기억의 재구성 – 해마가 과거를 다시 쓰는 이유
어제 먹은 저녁 메뉴가 기억나시나요? 아마 대부분은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정말 '그대로'일까요? 놀랍게도 우리가 떠올리는 기억은 원본 그대로가 아닙니다. 매번 꺼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고, 수정되고, 재구성됩니다. 이 사실이 두렵기보다는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갇히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기억의 재구성 현상과 그 중심에 있는 해마라는 뇌 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전문 용어는 최소화하고, 실제로 임상에서 경험한 사례와 최신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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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Freepik |
해마는 왜 '편집자'인가
뇌 깊숙한 곳, 양쪽 측두엽에 자리잡은 해마는 손가락 크기의 작은 구조물입니다. 이름은 해마(seahorse)를 닮아서 붙여졌죠. 이 작은 기관이 하는 일은 실로 놀랍습니다. 해마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새로운 정보를 임시로 보관하고, 그중 무엇을 장기적으로 저장할지 결정합니다. 마치 신문사의 편집장처럼 말이죠.
70대 알츠하이머 환자분을 진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30년 전 결혼식은 생생히 기억하셨지만, 10분 전에 드신 약은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는 해마의 손상 때문이었습니다. 해마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새로운 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전환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해마가 건강할 때는 매일같이 수천 개의 정보 중에서 '이건 중요해, 이건 버려도 돼'를 판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해마는 단순히 저장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저장된 기억을 다시 꺼내서 편집하기도 합니다. 200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에릭 캔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그 기억은 '불안정한 상태'가 됩니다. 이때 새로운 정보나 감정이 끼어들면 원래 기억이 수정됩니다. 이를 '재고정화(reconsolidation)'라고 부릅니다.
수면이 기억을 다시 쓴다
많은 분들이 "잠을 자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건 그냥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로 수면 중에 뇌는 엄청난 작업을 합니다. 특히 서파수면(깊은 잠) 단계에서 해마는 낮 동안의 경험을 '재생'합니다. 마치 녹화된 영상을 다시 돌려보듯이, 같은 뉴런들이 같은 순서로 발화합니다.
2007년 MIT의 매튜 윌슨 교수팀은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이를 증명했습니다. 낮에 미로를 탐험한 쥐의 뇌파를 측정했더니, 잠을 잘 때 똑같은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그것도 실제보다 7배 빠른 속도로요. 이 과정을 통해 신경 연결이 강화되고, 중요한 기억은 대뇌피질로 이동해 장기저장됩니다.
저는 대학원생 시절,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최악의 전략이었습니다.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않으면 해마가 기억을 정리할 시간이 없습니다. 실제로 2019년 UC 버클리의 매튜 워커 교수 연구팀은 하루 4시간만 자도 해마의 기억 형성 능력이 40% 감소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기억은 왜 왜곡되는가
"나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라고 주장하다가 녹음을 들어보니 전혀 다르게 말했던 경험, 다들 한 번쯤 있으시죠? 기억의 왜곡은 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건 거짓말이나 착각이 아니라, 뇌의 정상적인 작동 방식입니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시냅스 연결이 다시 활성화됩니다. 이 과정에서 현재의 감정, 믿음, 주변 상황이 끼어듭니다. 예를 들어,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평범한 대화였던 것도, 나중에 그 사람과 친해지면 "그때부터 뭔가 특별했어"라고 기억이 바뀝니다. 이건 거짓 기억이 아니라, 뇌가 현재의 의미 체계에 맞춰 과거를 재해석한 결과입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는 평생 거짓 기억을 연구했습니다. 그녀의 유명한 실험 중 하나는 이렇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어린 시절 쇼핑몰에서 길을 잃었던 '가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물어보면, 25%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구체적인 디테일까지 덧붙입니다.
이런 현상이 법정에서는 큰 문제가 됩니다. 목격자의 증언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죠. 하지만 일상에서는 이 기능이 우리를 돕습니다. 트라우마를 치유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다른 관점에서 보거나, 새로운 정보를 기존 지식과 통합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기억이 만드는 '나'
더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기억의 재구성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과거의 경험들을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엮습니다. 이때 해마는 파편적인 기억들을 서사 구조로 만듭니다.
심리학자 댄 맥아담스는 이를 '내러티브 정체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로 구성하고,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자신을 위치시킵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계속 다시 쓰인다는 겁니다. 좋은 소식은, 그래서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죠.
명상과 기억의 재해석
최근 명상의 신경과학적 효과에 대한 연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버드 의대의 사라 라자르 교수 연구팀은 8주간의 마음챙김 명상만으로도 해마의 회백질 밀도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동시에 편도체(공포와 스트레스 반응 담당)의 활성은 감소했습니다.
명상이 기억에 미치는 영향은 단순히 뇌 크기 변화를 넘어섭니다. 명상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평가'할 수 있게 합니다. 예를 들어, "그때 내가 실패해서 나는 무능해"라는 기억이 "그 경험 덕분에 나는 더 성장했어"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건 긍정적 사고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신경 회로가 재배선되는 과정입니다.
저는 환자분들에게 종종 '기억 재작성 훈련'을 권합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되, 그때의 자신을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 간단한 연습만으로도 많은 분들이 과거의 감정적 무게에서 벗어났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의미는 바꿀 수 있다
기억의 재구성 연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희망입니다. 과거의 사건 자체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바꿀 수 있습니다. 해마는 매일 밤, 매 순간 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의 최전선에서 사용되는 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도 이 원리를 활용합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면서 특정 안구 운동을 하면, 그 기억의 감정적 강도가 약해집니다. 기억을 불안정화시킨 후 덜 고통스럽게 재저장하는 겁니다.
결국 우리의 뇌는 하드디스크가 아니라 위키피디아에 가깝습니다. 계속 수정되고, 업데이트되고, 때로는 논쟁적이지만, 그래서 살아있습니다. 매일 밤 잠을 잘 자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명상이나 일기 쓰기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 이 모든 것이 당신의 과거를 다시 쓰는 펜입니다. 해마는 그 펜을 들고 있고, 당신은 언제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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